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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3월 독립운동가
3·1운동(1919년 3월 1일 )
훈격 :서훈년도 :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지배에 항거한 만세운동으로, 전 세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민족의 강렬한 독립 의지를 알림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지배에 항거한 만세운동으로, 전 세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민족의 강렬한 독립 의지를 알림
올해는 1919년 3월 1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유민임을 선언한다.’라고 ‘선언서’를 선포한 지 106주년이 되는 해이다.
19세기 후반 국제사회는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였다. 한국은 내정 개혁과 외국 문물의 수용을 통한 국가 발전을 추진하는 동시에 자주 주권국가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하는 난제를 극복해야 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1876년 무력적 강제 개항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전승국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결탁해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가 권력이 무력화(無力化)되어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총독을 정점으로 헌병무단통치를 통하여 식민지 직접 지배체제를 구축해 한반도를 유린하고 한국민들을 탄압하며 한국을 일본화(日本化)하려는 정책을 강행했다. 한국인들은 엄혹한 식민지 하에서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독립운동의 전환기가 마련되었다. 국권을 침탈당한 3,107일, 8년 6개월만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명의의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어 한국민들은 자주 독립을 주창하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는 3.1독립운동을 시작했다.
3.1독립운동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준비되었다. 손병희 집에서 천도교 지도자들이 회합했다. 이어 2월 상순 천도교와 기독교 계열 지도자들이 상의하여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의견서·청원서를 작성해 독립을 선언하고자 했다.
2월 11일 이승훈은 기독교 측 동지 규합을 위하여 평북 선천으로 귀가했다. 그는 양전백 집과 평양 기홀병원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2월 17일 서울로 상경했다. 2월 21일 천도교와 기독교 대표 간의 협의가 이루어졌고, 2월 24일 양교(兩敎)의 합동이 성립됐다.
2월 10일 독립선언서 기초가 만들어졌고, 2월 25일에 의견서, 청원서 등 문건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천도교 측은 2월 25~27일 기도회로 상경한 교직자 중 양한묵·이종일·박준승 등 15명을 대표로 선정했다. 기독교 측은 2월 27일 이승훈·양전백·유여대 등 16명을 선정했다. 불교 측은 2월 24~27일 문건 초안에 동의한 한용운 등 2명이 날인했다. 그리고 2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서 천도교 측 12명, 기독교 측 11명, 불교 측 1명 등 25명이 모여 3월 1일 명월관지점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2월 27일 이종일이 보성사 김홍규에게 신문관 직공이 짠 활판으로 선언서를 인쇄하게 했다. 김홍규의 지시를 받은 신영구가 오후 5시부터 11시경까지 21,000매를 인쇄하여 이종일에게 전달됐다. 천도교 측이 전북·충북, 강원·함경, 황해, 평남 지역에, 기독교 측은 황해, 평남, 평북, 함남, 경상, 전북 지역에 2월 28일과 3월 1일 사이 선언서를 교부했다. 불교 측은 한용운이 수령해 배포했다. 일본과 중국 상하이(上海) 등 해외에도 문건이 전달되었다.
2월 초부터 김원벽 등 학생대표들도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했고 민족대표들과 교류를 지속했다. 이들은 2월 25일~27일 회합에서 3월 1일 독립운동 참가, 전문학교 중심의 독립운동 계획 등을 협의했다. 2월 28일 밤 김문진이 독립선언서 1,500매를 승동예배당으로 가져왔다.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 십수 명이 선언서 100~300매씩을 교부받아 3월 1일 새벽까지 시내 각처와 민가에 배포했다.
3월 1일 정오 이후 학생들과 군중들이 파고다공원으로 집결했다. 민족대표들이 명월관지점인 태화관에 모였다. 이종일은 식장 탁자에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올려놓았다. 오후 2시 선언서 낭독을 생략하고 한용운이 일어나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어 크게 경하합니다. 더 한층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인사말을 한 후 일동은 모두 일어나서 만세를 삼창했다. 이어 출동한 일경들에게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됐다. 한편 공원에서는 오후 2시 30분경 육각당에서 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군중들은 공원을 나와 동서로 나뉘어 경성 시내를 여러 갈래로 활보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본정통으로 재집결한 군중들은 경찰의 제지로 해산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독립만세를 이어갔다. 경찰, 기마병, 군 병력들의 해산 강압에도 해질녘까지 곳곳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렸다. 밤에는 경기 고양의 양화진에서 학생과 주민 약 200명이 만세를 불렀고, 오후 11시경 신촌리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약 200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2월 중순부터 평안도․함경도의 기독교 교직자들은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인지했다. 천도교 측에서는 2월 하순 대표자들이 조직망을 통해 지방 교직자들에게 통지했다. 2월 28일부터 3월 1일 사이 교직자, 신도, 학생 등이 선언서를 지방에 교부하며 독립선언식이나 선언서 배포와 낭독 및 독립만세 고창 등 독립운동 실행 방법까지 전달했다. 그 결과 3월 1일 황해도 해주, 평안남도의 평양·진남포·안주, 평안북도 선천·의주·신의주, 함경남도 원산 등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3월 2일 황해 해주·수안, 3월 3일 충남 예산·경남 마산, 3월 5일 전북 군산, 3월 8일 경북 대구, 3월 9일 함북 회령, 3월 10일 강원 철원·전남 광주․담양, 3월 19일 충북 괴산에서 각 도(道)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지방에서 고종의 국장을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던 인사들이 경성의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에 직접 참여했거나 견문하고 귀향하여 3.1독립운동을 지방에 전했다. 일본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경성이나 고향에서 머물며 2.8독립선언을 전달하기도 했다. 3월 10일 경성의 휴교령으로 지방 출신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서울의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 알려졌다. 또한 3월 6일 보도 금지의 해제로 3월 7일자부터 언론보도가 이루어져 신문 판매 지역과 구독자들에게 3.1독립운동을 알렸다. 그리고 한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이 이웃 지역으로 전파되고 지역 간 이동 인사나 시장 장꾼들에 의해 만세 소식이 급속히 전파됐다.
3월 10일 전후에는 평남과 평북을 중심으로 황해와 함남 및 경기 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20일 전후는 충남과 경북 및 경남 지방으로 만세운동의 중심이 이동했다. 하순에는 독립운동이 일반화, 대중화되고 3월 26일 이후부터는 전국 13도 가운데 10~11개 도에서 매일 같이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이 시기 경기도에서는 1일에 적게는 22회, 많게는 33회까지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3월 31일 이후 4월 4일까지의 5일간은 각 도에서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4월 12일 11회와 4월 15일 14회를 제외하고 4월 13일부터는 추세가 급속히 약화되어 전국에서 10회 이하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19일, 22일, 25일, 30일의 4일에는 전혀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5월에 이르러서는 며칠 만에 1~2회의 만세를 불렀다.
5월 말일까지 경성과 경기 423회, 충북 87회, 충남 193회, 전북 43회, 전남 45회, 경북 122회, 경남 153회, 황해 180회, 평남 118회, 평북 150회, 강원 88회, 함남 85회, 함북 55회로 전국에서 1,744회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사전에 제지되어 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한 사례가 310회나 됐다. 독립만세를 외친 경우를 제외한 선언서가 배부된 곳은 66곳이고 유인물(격문, 경고문 등)을 제작, 배포 및 게시한 사례가 93곳에 이르렀다.
맨손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이 일반적 형태였지만 선언서, 격문 등 각종 유인물, 구한국기(태극기)나 독립 깃발을 제작해 독립만세 현장에서 배포하거나 독립 연설을 통해 독립만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시장이나 마을을 활보하고 인접 마을이나 타 지역으로 행진을 하는 원정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3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 동안 경북 의성의 안평, 4월 2일부터 6일까지 5일 동안 충북 영동의 황간, 4월 4일부터 4월 7일까지 4일 동안 강원 양양에서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면내 각 마을이나 인접 면, 군(郡) 읍내로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또한 독립만세운동의 발전적 형태인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월 23일 충북 청주의 강내 대성리에서 조동식이 봉화고변지례(烽火告變之例: 변고(變故)가 있을 경우 봉화를 올려 변고를 알리고자 하는 것)에 따라 주민들과 마을 산 위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사방에 독립만세운동을 알렸다. 이 독립운동은 충북, 경기, 강원, 황해, 평북 지역에서도 전개됐다. 충남에서는 연기, 공주, 청양, 예산, 아산, 홍성, 서산 등 12개군, 64개면, 216개 마을에서 338회의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특히 4월 4일 예산군 9개면 18개소, 홍성군 4개면 24개소, 당진군 면천 8개 마을과 순성 10개 마을 등 3개군 15개면 60개소 산 위에서 횃불이 올려지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어린 아이들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3월 10일 함남 신흥의 동고천에서는 학생과 주민들이 어린 아이(小兒)와 함께 헌병분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0일 함북 종성의 용계 종산동 헌병주재소 뒤편에서 10~13세 서당 학생 5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남편에 이어 부인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북 영덕에서는 3월 18일 영덕 읍내에서 김태을, 3월 19일 지품 원전동 시장에서 주명우가 독립만세를 외쳐 영덕경찰서에 구금되자, 부인인 윤악이와 신분금은 3월 24일 함께 시장에 나아갔다. 윤악이가 ‘자신들은 여자이지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여 한국만세를 부른다’고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고령(高齡)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권유한 활동이 이어지기도 했다. 4월 1일 강원 횡성 읍내에서 수비대의 무력 진압으로 5명이 순국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천선재는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인접 면인 영월군 수주면, 양변면에서 4월 8, 9, 10일 3일 동안 독립만세 권유 활동을 전개했다가 징역 1년의 옥살이라는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경찰과 헌병뿐만 아니라 주선 주둔 병력, 증파 병력, 철도엄호대 병력과 소방조원까지 출동시켰고 재향군인회원 및 일본인 민간인까지 동원시켜 만세 군중을 진압했다. 3월 7일부터 군 병력을 분산배치체제로 바꿔 수시로 이동시켰다. 4월 7일경 헌병 장교 이하 65명, 헌병보조원 약 400명, 4월 10일 이후 6개 대대가 일본에서 증파됐다.
일제의 탄압으로 무력 발포가 254건, 총검 등으로 시위대를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힌 것이 41건, 곤봉이나 소방도구 기타 무기 사용이 10건, 방화 3건 및 파괴 4건이 자행됐다. 체포된 한국인들은 주재소에서 1차 신문조사를 받은 후 경찰서, 헌병분견소 및 분대로 압송되어 제2차 신문조사를 받았다. 폭행, 고문 등의 악형을 당한 후 훈방되기도 하고 경찰서장이나 분견소장 및 분대장의 즉결처분으로 30~90도(度)의 태형을 당했다. 무력 진압 다음으로 태형은 직접적이고 즉각적 탄압 효과로 3.1독립운동을 약화시키는 주요 수단이었다.
검찰의 기소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은 사법적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 행태로 인해, 3월 4일 평남 원장-사천시장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조진탁·최능현·송현근·차정신 4명이 사형, 임원걸·서영석 등 16명이 무기징역 또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최고형이 선고되었다는 점에서 탄압의 수위를 짐작할 수 있다. 3월 18일과 19일 경북 영덕의 영해와 창수의 독립운동 참여자 170명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4월 1일 경기 안성의 원곡-양성 독립운동 참여자 125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 징역 12년까지 선고받았다.
일제와 일본인 피해의 배상을 청구하는 사소(私訴)가 제기되기도 했다. 3월 18일 경북 영덕 영해에서 시위자 18명에게 14,252엔이 청구되었고, 3월 21일 안동 임동에서 유동수 등 26명에게 1,000엔이 청구되었다. 4월 1일 경기 안성 양성에서는 주재소, 우편소, 일본인 2명(제1~4호)이 만세 시위자들에게 6,561엔 68전을 청구했다.
우리가 ‘한국 민족으로서 당연한 국민의 의무’로 ‘나라를 사랑하는 자의 도리로 좌시할 수 없어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3.1독립운동이었다. 이는 ‘민족의 염원’으로‘우리의 자유와 독립과 국권을 옛 상태’대로 되찾아 ‘인도와 정의 그리고 생존 존영을 위해 조선을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3.1독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상에서 독립운동의 진정성(眞正性, the genuineness of the independent movement)을 보여준다. 이는 참가 지역, 전개 횟수, 참가자 인원․직업․연령․행형(行刑) 사실 등 여러 측면에서 입증된다. 예를 들어 현재 남아 있는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4,855건 가운데 1910~1919년간 수형자가 4명(에 불과한 것에 비해, 1919년 3.1운동 참가로 인한 수형자는 893명에 달한다. 즉 절대 다수의 순전(純全)한 한국민이 오로지 민족과 국가의 자유 독립을 위해 의연히 궐기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독립운동이 3.1독립운동이었다.
1919년 이전까지 민족독립운동이 지역·개인·집단·단체별로 추진되었던 반면, 3.1독립운동은 전국적․전국민적․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3.1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의 용광로였으며 한편으로는 향후 다양한 형태로 민족독립운동이 발산되는 기폭제였던 것이다. 운동의 결과 최초로 공화정체를 근간으로 각 임시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됐다. 농민·노동·사회·학생·여성 등 각 계층별 사회운동을 통한 다양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1920년대 국외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강화시켜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일제의 식민통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어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중국, 인도, 인도차이나반도, 필리핀, 아랍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세계 식민지·반식민지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자극제가 되었고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독립운동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세계민족운동사에 신기원을 이루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의 ‘선언서’는 자주독립정신과 자유·평등 정신 및 정의·인도·평화의 인류 공영 정신에 입각한 민주공화국가 건설을 추구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주의 일본이 패전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은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 인도로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지표로 삼아 오늘날 자유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