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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채보상운동의 의미와 배경
-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주도층
- 3.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 4. 국채보상운동의 종식과 결과
- 5. 맺음말
- 1. 국채보상운동의 의미와 배경
-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주도층
- 3.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 4. 국채보상운동의 종식과 결과
- 5. 맺음말
1. 국채보상운동의 의미와 배경
1) 국채보상운동의 의미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부터 1908년 7월까지 국채를 국민적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대한제국기 구국을 위한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나눠진다. 의병전쟁은 구국을 위해 일본 침략세력에 저항했던 무력투쟁이었고, 애국계몽운동은 구국을 위해 신교육구국운동과 산업진흥운동, 그리고 국민계몽운동으로 전개된 문명개화운동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애국계몽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교육과 산업, 그리고 국민계몽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정치·경제·문화운동이었다.
대한제국기 국채보상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운동이었다.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열기도 매우 높았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참여는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 국채보상운동의 배경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은 “한편으로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보조‧유지‧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보수 지배 세력의 횡포로부터 민중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해 민중의 의식을 계발한 조직적인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는 1904년 6월 서울에서 설립된 국민교육회이다. 국민교육회는 교육 진흥을 위해 학교의 설립, 문명적 학문에 응용할 서적의 편찬과 번역, 한국 역사책과 지리책 및 고금 명인 전적을 수집하여 널리 펴내는 등 교육과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기 대구지역 애국계몽운동은 1904년 설립된 우현서루와 1905년 2월 설립된 시무학당이 그 시작이었다. 이와 더불어 1906년 1월 설립된 대구광문사와 같은 해 8월 설립된 대구광학회가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목표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대구광문사와 대구광학회가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의 지배가 점차 노골화되면서 자산가인 지주⸱상인 계층은 직접적인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과정에서 늘어난 국채 1,300만원과 그에 대해 난무하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일본이 국채 1,300만 원의 담보로 대한제국 정부가 가진 전국의 수조권을 차지한다는 유언비어도 그중의 하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기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원이 국가의 독립을 위협한다는 영남지방 상인들의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일제 침략세력은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을 차관으로 제공하였다. 나아가 러일전쟁 이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1904년 9월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일제의 차관 공세의 목적은 첫째,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었고, 둘째,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관은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 토착 상인의 경제적 독립을 위협했다.
한국의 토착 상인은 일본 침략세력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채를 상환하여 재정적 자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가졌다. 국채보상은 처음 부산·동래에서 논의되었고, 곧이어 대구에서 발의되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국채보상은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부산·동래와 대구 두 지역 상인들의 대응책이었고, 나아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응하여 구국을 위한 국권회복운동과도 그 목표가 일치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적·국민적·애국적인 헌금운동으로 확대되었다.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주도층
1) 대구광문사 발의와 북후정 민중대회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즉 1907년 1월 29일(음력 1906년 12월 16일) 대구광문사의 서상돈·김광제 등이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열었고, 회의를 마친 후 서상돈이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자.”는 건의서를 낭독하면서 발의되었다. 곧이어 대동광문회는 이 운동을 널리 확산시키고자 했다. 즉시 서상돈의 건의서를 「국채보상취지서」로 변경하여 지방의 각 지역과 서울의 주요 언론기관까지 전국적으로 배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이 발의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이미 경남의 동래에서 국채보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설립된 국채보상기성회의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에 의하면 “영남의 동래와 대구 등지의 여러 군자들이 담배를 끊어 보상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동래와 대구 등의 여러분들이 한 몸으로 뭉쳐 이 회를 만들어 국채보상기성회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부산 동래에서 처음 제기되어 대구에서 발의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 침략에 위협을 느낀 대구와 동래 두 지역 상인들의 대응책이었다. 또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응하여 일어난 국권회복운동과 그 목표가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가 국채보상을 발의한 뒤, 곧이어 2월 초순에 「국채보상취지서」를 각지에 배포하였다. 서상돈·김광제 등은 서문 밖 수창사 안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두는 한편, 1907년 2월 21일 북후정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북후정 민중대회에서 대구민의소는 「민의소규칙」을 제정하고, 「금연상채회임원록기」를 작성하여 임원을 정하였다. 이날 제정된 「민의소규칙」은 「금연상채회규칙」이었다.
북후정 민중대회에서는 금연상채회 회원을 비롯하여 부녀자들도 동참하여 기꺼이 패물을 내어놓았다. 심지어 걸인·백정·마부·종업원 등까지 돈을 냈다. 첫날에 모인 돈이 거의 500원이나 되었다. 2월 24일 다시 대구금연상채회는 북후정에서 연설회를 개최하고 의연금을 모았다. 그러나 대구경찰서에서 파견된 순사는 연설하는 금연상채회 회원을 연행하고 해산을 요구하며 위협하였다. 대구금연상채회는 대표 서상하·도정호·이근영을 관찰부에 파견하여 국채보상취지서와 규칙을 제출하며 교섭을 벌였다.
북후정 민중대회가 개최된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보도하였고, 다음날인 22일에는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되었으며, 뒤이어 23일에는 대구에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은 전국 각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2) 국채보상운동의 주도층
대구금연상채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서상돈을 비롯한 대구광문사 계열의 상인들이었다. 대구금연상채회는 대구광학회 계열의 전 경주 군수 이현주가 회장을 맡았으며, 대구광문사 계열의 정재학이 부회장, 정규옥이 총무, 그리고 경상북도 시찰을 역임하였던 전 경주 군수 김병순(본명 김윤란)이 서상돈과 함께 재무를 맡았다.
대구지역의 유력 상인층은 정부의 조세징수 과정에서 세금대납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대구광문사를 주도한 서상돈을 비롯하여 정규옥·정재학·김병순·정해붕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서상돈은 1895년 탁지부의 세무 시찰관, 1903년 내장원의 경상남북도 검세관, 1903년 11월 김병순 등과 함께 징세장, 같은 해 12월 최영달과 함께 경상남도 시찰관으로 세금대납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때 김광제는 동래 경무관을 거쳐 삼남찰리사로 있었다.
서상돈·정규옥·서병오·정재학·서상하·이장우·이일우·최만달·최대림·박기돈·이종면 등 신흥 자본가 세력은 대한제국기 대구지방의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1906년 1월 대구광문사와 1906년 8월 대구광학회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자치기관인 인민대의소와 대구시의소를 설립하여 민권의 신장과 민중 의식의 성장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06년 1월 사범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인이나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대구금연상채회 회원으로 서상돈·이일우·정재학 등은 상인 및 지주였으며, 김광제·김병순·이현주·길영수 등은 전⸱현직 관료였다. 그리고 윤필오·서병오·정해붕 등은 경상감영과 대구부의 서리였다. 그들의 직함은 지주 및 상인, 전·현직 관인, 감영의 서리, 그리고 유생이었다.
3.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1) 국채보상운동 단체의 조직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21일 대구금연상채회가 개최한 북후정 민중대회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2월 22일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결성되었고, 곧이어 26일 국채보상중앙의무사가 설립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지도적인 기관이 없었던 초기에 대한매일신보사와 황성신문사 등의 언론기관은 자연스럽게 구심점이 되었다. 초창기에 국채보상기성회를 발기한 회원들이 보상금의 수합기관으로 대한매일신보사를 배정하였지만, 대한매일신보사는 이를 사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국채보상중앙의무사는 황성신문사를 임시수금소로 지정하였는데, 황성신문은 3월 1일 광고를 통해 국채보상중앙의무사의 국채보상금영수소로 자처하였다.
1907년 3월 28일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규정」을 싣고 “총합소임시사무소는 대한매일신보사 내”로 한다는 별보를 통하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설립을 선언하였다. 1907년 4월 8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립하였다. 한편, 황성신문사는 4월 중순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보성관에서 발족하였다. 전자인 지원금총합소는 소장 윤웅열, 평의장 조존우, 검사원 김광제를 선인하였고, 후자인 연합회의소는 소장 이도제, 부소장 이용직을 선임하였다. 나아가 연합회의소는 조직을 개편하여 소장 이용직, 부소장 지석영을 선임한 뒤, 5월 8일에는 재무이사로 한일은행장 조병택, 천일은행장 김기영, 농공은행장 백완혁, 한성은행장 한상룡, 창고회사장 조진태 등 서울의 5대 은행장을 추대하였다. 이로써 두 단체는 국채보상운동의 큰 축을 형성하였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단체의 조직과 참여는 자발적이고 열성적이었다.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와 국채보상중앙의무사가 취지서를 발표한 뒤, 각지에서 국채보상기성회·단연회·국채보상의성회·국채보상의무회·국채보상동맹·국채보상회·단연동맹회·국채보상혈맹회 등의 이름으로 단체들이 조직되어 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국채보상운동 단체는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주도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2월 21일 북후정 민중대회가 개최된 뒤, 대구 남일동에서는 2월 23일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조직되어 취지서를 발표하는 등 그 반응이 대단하였다. 우선 대구금연상채회의 대구국채보상사무소는 각 부와 각 군에 취지문을 돌려 보상금을 기부하도록 격려하였고, 보상금의 수집 방법으로 각 도·군이 규정을 만들도록 권장하였다.
경상북도에서도 대구금연상채회가 각 지역으로 취지문을 돌리면서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3월 13일 고령군단연상채회가 설립된 이후, 3월부터 5월에 걸쳐 각 군에서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즉 고령군단연상채회를 시작으로 3월에는 성주·선산·김천, 4월에는 청도·상주·경산·예천·문경, 5월에는 현풍·용궁 등지에서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경상남도에서는 동래는 처음 국채보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곳이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발기되자 이에 호응하여 1907년 3월 초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 4월 중순 부산항 좌천리 감선의연부인회와 5월 초 좌천리 단연동맹회가 결성되었다. 1907년 3월 말경 창원⸱마산항 국채보상의연소, 1907년 6월 김해군 명지면 국채보상동맹회 등을 비롯하여 진주·밀양·하동·의령·진남·단성·안의 등지에서도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경기도에서는 일찍이 인천항 신상회사의 단연동맹회가 설립된 이후, 1907년 2월 말 통진군 사립 분남학교 의연금수합임시회소와 4월 국채보상의연수합소, 1907년 5월 포천군 국채보상포의소, 1907년 6월 이천군 국채보상보성의무사 등 김포·장단·강화·양주·파주 등지에서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충청도에서는 1907년 3월 초 충청도 54개 군 유지의 「국채보상의조권고문」이 발표된 이후, 3월 중순 예산군의연금모집소, 4월 말 은진군 국채보상의무소를 비롯하여 덕산·해미·부여·진잠 등 충청남북도 일원에서 국채보상의조회·국채보상기성회·국채보상일심동맹회·국채보상금수습소·국채보상동심사 등의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전라도에서는 1907년 2월 20일 전북 정읍에서 정읍단연회가 설립되었고, 곧이어 3월 초 전라도 인사들이 대동광문회 지회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3월 중순 금산군 국채보상일신동맹회, 익산군 국채보상단연회, 3월 하순 진안·장수양군 국채보상회, 3월 하 여산군 국채보상의무회를 비롯하여 무장·전주·부안·태인·무주·군산·정읍 등지에서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그 외 황해도·함경도·평안도·제주도 등에서도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2) 국채보상의연금의 모집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족지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등은 모두 국채보상운동을 자발적인 모금운동으로 보도했다. 이를 근거로 기존의 연구에서도 애국적이고 자발적인 관점으로 파악하였다. 물론 국권회복에 대한 열망이 충만한 개인과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전국적인 모금 운동으로 확산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국채보상운동은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 의연금을 헌납하는 데는 국민 상하의 구분이 없었다. 경북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 회장 이승희는 국채보상취지서에서 헌금을 국민의 당연한 도리로 강조하였고, 자신도 가사를 돌보지 않고 전념하였으며, 그 자신의 회갑연으로 쓸 20원을 의연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의연금 모집에 참여한 계층도 매우 다양해졌다. 당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등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부녀자·상인·군인·학생·노동자·걸인 등 국민 상·하의 구분이 없었다.
1907년 2월 23일 결성된 대구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는 그 취지서에서 “남성 위주의 편파성을 지적하면서 전국에 여성들이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부녀층으로 대구를 비롯한 경북지역 각처에서는 기생·주모·과부·빈곤층 등의 부녀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상인층은 도시의 상인단체와 영세한 기층상인까지 참여하였다. 상인단체는 국채보상운동을 실제로 주도하였고, 기층상인은 대구의 경우 짚신장수와 콩나물장수, 그리고 술과 떡을 파는 노파들이 의연에 참여하였다. 경북 성주에서는 부싯깃 장수·콩나물 장수 등이 참여하였고, 서울에서는 노동자·인력거부·고용원 등이 의연에 참여하였다.
군인·순검 등의 참여도 주목된다. 중앙의 시위대나 지방의 진위대 장교를 비롯하여 궁궐을 지키는 순검, 시종무관부의 사환들도 의연에 참여하였다. 봉화에 주둔하고 있던 원주진위대 소속 위관 민긍호는 봉급을 의연하여 봉화군민의 의연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또 의병이나 화적까지 국채보상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호의를 보였다. 1896년 김산의진과 1906년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의병장 벽도 양제안은 민중들이 모인 가운데 연설회를 개최하였고, 청도 출신 의병장 최한룡은 격문을 발표한 뒤 창의하였다. 심지어 영천·경주 등지에서는 화적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양민들에 대한 침해를 중단하고 자신들도 참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례들은 신문 보도를 통해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경우이다. 이러한 사례는 국채보상운동의 실체를 자발적인 모금운동으로 단정토록 하는 것이다.
경북 고령군의 경우, 1907년 3월 13일 설립된 고령군단연상채회는 서울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대구금연상채회의 지도를 받아 면·리의 자치기구를 조직화하고 의연금을 배분·할당하여 갹출(醵出)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향약을 기반으로 하는 자치조직을 이용한 것이었다. 고령군단연상채회는 향교를 통해 면을 단위로 총대와 임원을 배치하고, 각 마을의 세금 납부의 의무가 있는 정남을 대상으로 의연금을 할당·배분하였다. 경북 경주와 상주의 경우에도 의연금 수집 상황은 대체로 비슷하였다.
4. 국채보상운동의 종식과 결과
1) 일제의 방해 공작과 탄압
김광제와 서상돈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통합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인 단일화를 모색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07년 5월 말 지원금총합소의 검사원 김광제와 연합회의소의 총무 이강호는 상호경쟁을 피하고 협조하기로 협의했다. 이리하여 전자는 각처에서 수금한 의연금을 관장하고, 후자는 운동의 지도방침을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광제와 서상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단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에 따른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강요, 그리고 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탈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뿐 아니라 1907년 11월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 김종환의 일진회 가입과 11월 국채보상기성회 총무 오영근의 보상금 횡령사건 등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이 국채보상운동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권 회복을 꾀하는 배일운동’으로 인식하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 총합소 회계를 맡은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을 1908년 7월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하였다. 통감부는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裵說)을 추방하기 위한 방해 공작으로 국채보상금 소비사건을 조작하였다. 양기탁은 다섯 차례의 재판 결과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은 계속됐고, 이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이 상당 부분 위축되었다.
1908년 7월 말 이후 대구금연상채회의 이현주·서상돈·정재학 등은 이 운동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해 광고를 내고 전 국민이 대동단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축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열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2) 의연금과 처리 방안
일제의 방해 공작이 노골화되면서 더이상 국채보상운동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국채보상 의연금 총액에 대한 경무고문의 「국채보상모집금의 건」(『기밀서류철』, 정부기록문서, 문서번호 88-1)에 의하면, 1907년 5월까지 모집금의 총합은 241,908원, 같은 해 6월 중 모집금의 총합은 31,690원이며, 모두 272,689원에 이르렀다. 또 이것을 각도별로 구분하여 표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될 당시 1,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것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모금액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던 5월까지 전국적으로 241,098원이 모금되었고, 6월 중에는 31,590원에 불과하였다. 1907년 8월 22일 총합계는 272,689원이었다.
1907년 5월 말부터 모금된 보상금 관리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각처의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은 이미 모금한 의연금조차 중앙의 수집소로 보내기를 주저하면서 5월 말 이후의 모금은 거의 정체되어 있었다. 더욱이 일제의 방해 공작이 공공연히 펼쳐지는 가운데 초기의 열기는 급격히 식어갔다. 1910년경에는 일본에 대한 국채가 1,450만 원으로 불어났다.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된 의연금은 모두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한편 1908년 10월 1일 출연된 의연금을 조사하기 위한 국채보상금검사소가 설립되었고, 1909년 11월 16일 국채보상금처리회가 경성상업회의소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1910년 4월 18일 국채보상금처리회 국민대총회가 흥사단 내의 사무소에서 열렸다. 이 총회에서 “국민의 대동한 의견이 토지를 매수하여 그 수조 이익으로 교육비에 사용하기로 의결”하였다.
1910년 9월 중순 회장 유길준을 비롯한 위원 40여 명은 “일한병합의 금일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의 기본금”이란 전제 아래 국채보상처리회를 교육기본금관리회로 개칭하였다. 우선 교육기본금관리회는 1910년 10월 중에 각도에 전답을 매수하거나 기호학회, 교남교육회 등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편, 의연금을 모집하여 보관하고 있던 각처의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은 그 지역의 교육비로 활동하거나 상환하였다. 경북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를 이끌던 심산 김창숙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모은 돈으로 청천서원에 사립 성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전기의병 때 김산의진에 참여했고, 후기의병 때 산남의진에 참여한 후에 영일군 죽장면 두마리의 보현산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벽도 양제안은 개별적으로 모금한 의연금 수백 원을 보관하고 있다가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된 뒤 모두 되돌려 주었으며, 이 과정에서 의연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