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2024년 09월 독립운동가
안춘생 / 조순옥 / 박영준 / 신순호(1912 ~2011/1923 ~1973/1915 ~2000/1922 ~2009)
훈격 :독립장 /애국장/독립장/애국장 서훈년도 :1963/1990/1977/1990
1940년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특파단으로 파견되어 군사활동 전개,
1942년 이후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으로 항일독립운동 전개
1940년 광복군 입대,
1942년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원으로 항일독립운동 전개
1938년 한국광복진선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항일독립운동에 매진
1945년부터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으로 항일독립운동 전개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독립운동 전개
1940년대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
안춘생 , 1912 ~2011 , 독립장 (1963)조순옥 , 1923 ~1973 , 애국장 (1990)박영준 , 1915 ~2000 , 독립장 (1977)신순호 , 1922 ~2009 , 애국장 (1990)
독립운동의 역사는 대를 이어 독립운동 명문가를 낳았다. 남다른 민족정신을 갖추며 성장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의 자제들은 자신도 독립운동가로 거듭나는 한편, 또 다른 인연을 맺어 독립운동 대가족을 일궈냈다. 안춘생‧조순옥과 박영준‧신순호, 이들은 독립운동의 대업을 가업으로 이은 광복군 부부이다. 구국정신을 상징하는 안중근가의 안춘생, 6형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조정규가의 조순옥,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신규식가의 신순호, 대중 외교활동에 앞장선 박찬익가의 박영준, 이들은 독립운동 가문에서 태어나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청년 독립운동가이자, 광복군 부부였다. 이들은 50년간 축적된 독립운동의 역량과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독립운동가이다.
안춘생은 1912년 8월 1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장근(안중근의사의 사촌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황해도 일대의 명문가였던 그의 집안은 1909년 안중근의거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으며,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의 주동자로 안명근이 지목되며 고초를 겪었다. 결국 그의 일가는 황해도 벽성군 금산면, 만주 지린성(吉林省) 무링현(穆陵縣),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에 흩어져 이산(離散)되었다. 1920년대 안춘생 일가는 무링 인근의 함경도촌을 거쳐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퉁허현(通河縣)·이란현(依蘭縣)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때 안춘생은 퉁허에 있는 양진학교(養進學校)에서 소학교와 중학 과정을 마쳤다. 독립운동과 관련 깊은 교사가 많았던 양진학교에서 국어와 역사 등을 배운 덕분에 민족의식을 더욱 함양할 수 있었다.
만주에서 성장한 청년 안춘생의 인생은 일제의 만주침략이 전면화되며 소용돌이쳤다. 1920년 일본군에 의한 한인대학살(경신참변)을 목격했던 그는 1931년 만주침공 후 중국인에 대한 일제 탄압을 재경험하며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특히 관동군과 맞서 싸우는 중국 마잔산(馬占山) 항일군의 활약을 듣고 이에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하이런현(海倫縣)으로 마잔산부대를 찾아갔다가 1932년 윤봉길의거 소식을 듣고 중국 관내로 들어갔다. 이때 위해위(威海衛)에 살고 있던 안정근(안중근의 동생)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와 협상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 내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지청천(池靑天)·오광선(吳光鮮)·이범석(李範錫) 등 만주에서 활동한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교관으로 활약했다. 1934년 2월 안춘생은 16명의 동지와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왕형(王衡)'이란 중국식 가명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6년 6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 보병과를 졸업한 그는 중국 육군 제2사 보충여3단 8연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그는 장쑤성(江蘇省) 타이현(泰縣)에서 모병한 신병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한편, 안공근, 안경근이 주도하고 있던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한국국민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안춘생은 중국군 장교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가 속한 육군 제2사는 장쑤성 서쪽과 상하이 지역을 방어하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상하이 북쪽 관문인 장완(江灣)지구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1938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후방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그에게 포상했다. 안춘생의 활약은 신한민보를 통해 미주 동포들에게도 전해졌다.
중국군 장교였던 그는 중국 측과 접촉하여 임시정부 가족들의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커우(漢口), 광저우(廣州), 창사(長沙) 등지로 임시정부 가족들이 이동할 때 이를 엄호하기도 하였다. 1938년 창사에서 열린 3.1절 19주년 때는 기념대회에 참석하고, 기념공연에서 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직후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대비하며 군사조직 창설을 추진했다. 1937년 7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며 독립전쟁 계획안을 수립한 임시정부는 1939년 군사특파단을 조직하여 시안(西安)에 파견하였다. 이때 안춘생은 노백린의 아들 노태준 등과 특파단에 합류하여 산시성(山西省) 일대에서 초모(병력 모집) 활동을 담당했다. 군사특파단은 한국광복군의 토대가 되었다. 군사특파단이 확보한 거점을 중심으로 각 지대가 조직되고, 병력이 확보되었다. 광복군 총사령 참모 이준식(李俊植)과 함께 활동하던 안춘생은 광복군 제1지대에 배속되었다. 제1지대는 징모(徵募) 제1분처로서 산시성 타이위앤(太原)·스자좡(石家庄)·린펀(臨汾) 지역 한인들을 대거 포섭하였다. 그는 일본군에 속했다가 중국군 포로가 된 한인들을 석방시켜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병력 등의 합류로 광복군이 개편되자,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을 맡았다. 당시 제2지대장은 이범석, 제2구대장은 노태준, 제3구대장은 노복선이었다. 광복군의 핵심 부대였던 제2지대는 한인 병사 초모 활동과 함께 미국과 공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하였다. 광복 후에는 중국군 포로가 된 일본군 출신 한인 병사들을 구출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를 편성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하이에 집결한 광복군 잠편지대를 통솔하던 그는 1946년 6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한국광복군 출신 육군 장성으로 손꼽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교장과 제8사단장 등을 맡은 후 전역하였다. 이후에는 광복회 회장, 독립기념관 초대 관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여성 광복군 조순옥은 1923년 9월 독립운동가 부부인 조시원(본명 용원, 63년 독립장)‧이순승(90년 애족장)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소앙(본명 용은, 89년 대한민국장)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가 조용하-용은-용주-용한-용제-시원 6형제 일가에서 성장하였다. 1932년 조부모 조정규, 박필양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며 그의 일가는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대가족이 되었다. 부친 조시원은 상하이와 만주,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독립운동가와 공조하며 의열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중심 정당인 한국독립당의 주요 인사로서 활동하면서 당군으로서의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의 부관이 되었다. 이때 조순옥은 오광심(김학규의 부인), 지복영(지청천의 딸)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한 조순옥은 부친 조시원과 함께 최전방 시안으로 이동하여 총무처에서 소임을 맡았다. 이때 함께 파견나간 안춘생과는 이후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1942년 4월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 2분대원이 된 그는 구대장 안춘생과 함께 적 점령 지구에 있는 한국인 청년과 일본군 포로 등을 포섭하여 대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여성 광복군의 상징적 존재이자, 광복군이 맺어준 부부 독립운동가로 대표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영준은 1915년 11월 만주 롱징(龍井) 난다라즈(南大辣子)에서 박찬익(朴贊翊)의 3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박찬익은 대종교와 연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있었고,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외무차장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맡아 주로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때문에 박영준은 1932년까지 부친과 떨어져 지내야 했으나, 중학 진학을 앞두고 상하이에 건너와 5남매 중 유일하게 부친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임시정부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다녀야 했으며, 대중 외교를 책임지던 박찬익은 국민정부와의 교섭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이로 인해 박영준은 난징, 자싱(嘉興), 광둥(廣東) 등지의 학교를 다녀야 했다.
1937년 11월말 상하이를 떠난 그는 창사에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8년에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항일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10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이 된 그는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고취하고 한중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항일예술, 문화활동을 전개하였다. 11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여, 1941년 12월 제17기로 졸업하였다. 군관학교 시절부터 한국인 병사들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에 참여하던 박영준은 한국광복군 창설 후 합류하게 되었다.
1940년 9월 창설된 광복군은 좌우익 계열의 무장조직을 포괄하며 1942년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제1지대와 제5지대는 제2지대로 재편성되었으며, 총사령부 구성원도 대폭 보강되었다. 박영준은 1942년 4월부터 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군무 행정을 담당하였다.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그는 임시정부 수호에 앞장서며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1943년 6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이 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43년 12월 12일 박영준은 우스예샹(吳師爺巷) 임시정부 청사 대례당에서 신건식의 딸 신순호와 결혼하였다. 이때 박찬익은 “가정을 갖고 자식 다섯을 두었지만, 자식 결혼식에 참석하기는 오늘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됩니다”라며 벅찬 소회를 밝혔다. 이미 청년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박영준과 신순호는 이후 함께 독립운동 대열에 서며 공동의 투쟁을 벌였다.
1945년 3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이 된 박영준은 적진 깊숙한 곳곳에서 선전․정보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인 병사들을 모집하며 활약하였다. 관내 요충지인 카이펑지구(開封地區)에서 광복을 맞이한 그는 포로가 된 한인 병사들을 석방시켜 광복군 잠편지대에 배속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 대부분이 국내로 귀국했지만, 그의 가족은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의 전후 외교를 도맡게 되었다. 박찬익이 주화대표단의 대표로서 대중 외교를 계속 담당하게 된 것이다. 주화대표단은 중국과의 외교는 물론 중국내 한인들의 안전과 보호를 담당하는 역할을 이어갔다. 주화대표단은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동북지역에 총판사처를 설치한 후 난징에 본부를 두었다. 주화대표단를 이끌던 부친과 함께 선무(宣撫) 활동을 담당하던 그는 1949년 4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환국 후에는 안춘생과 함께 육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한국광복군동지회장 등을 맡으며 독립운동의 위업을 선양하는데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신순호는 1922년 신건식과 오건해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건식은 1911년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후, 동제사 및 임시정부 활동을 함께 했다. 1920년 전후 국내를 오가며 비밀리에 활동하던 그는 일제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1922년경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같은 해 신규식이 서거하자 중국군 군의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외과주임 등을 맡으며 중국군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임시정부에 복귀하여 선전부, 재무부 등에서 활동하며,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부친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에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신순호는 4세 때 모친 등에 업혀 상하이로 건너갔다. 1926년 3월의 일이었다.
상하이에서 가족의 상봉이 이뤄졌지만, 가정 형편은 순탄치 않았다. 1932년부터 임시정부가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자 어린 신순호는 부모를 따라 고난을 함께 해야 했다. 학교 또한 제대로 다니지 못해 곳곳을 전전해야 했다. 망명 가족의 설움을 겪던 그는 17세가 되던 1938년 11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항일 예술 선전활동을 전개하던 청년공작대에서 활약하였으며, 한국광복군 창설 후에는 총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1942년에는 부친을 도와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충칭에 자리를 잡은 신건식·오건해·신순호 가족은 임시정부 대가족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신건식은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의술로서 사람들을 보살폈다. 오건해는 병환으로 고생하는 이동녕 등을 돌보는 한편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대모로서 역할하였다. 신순호는 그런 부모와 함께 공사(公私)로 임시정부 사람들을 도왔다. 1940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부상당한 박찬익을 간호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이 신건식-박찬익 가족의 교분은 더욱 두터워졌으며, 박영준과 신순호의 애정은 깊어졌다. 그렇게 또 한 쌍의 광복군 부부가 탄생했다.
1910년대부터 이어진 양가의 친분과 청년공작대에서부터 이어진 박영준-신순호의 인연은 1943년 결혼으로 결실을 맺었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결혼식의 주례는 외무부장 조소앙이 맡았으며, 결혼증서에는 주석 김구가 주례로 이름을 올렸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은 조완구는, “비록 성은 다르지만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신순호는 광복 후 박영준과 함께 주화대표단의 교민 보호 활동에 앞장섰다. 신건식-박찬익으로 이어진 대가족은 임시정부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대중 외교활동을 책임지며 활동하다가 1949년 돌아오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평생을 함께 한 부부는 국립서울현충원에 함께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