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독립운동가

08월의 독립운동가

곽낙원 / 임수명 / 이은숙 / 허은(1859 ~1939/1894 ~1924/1889 ~1979/1909 ~1997)

훈격 :건국훈장 애국장/애국장/애족장/애족장서훈년도 :2019/1990/1993

김구의 어머니,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적극 지원

신팔균의 부인, 만주에서 비밀문서 전달과 연락체계 유지 등을 통해 독립운동 지원

이회영의 부인, 191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

허위의 손녀, 이상룡의 손부, 1922년부터 서로군정서 요원에게 가사 지원 및 군복 배급 등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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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낙원 / 임수명 / 이은숙 / 허은

곽낙원 , 1859 ~1939 , 애국장 (1992)임수명 , 1894 ~1924 , 애국장 (1990)이은숙 , 1889 ~1979 , 애족장 (2018)허은 , 1909 ~1997 , 애족장 (2018)

1. 여성들의 항일투쟁

한국 근대사는 여러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여성들은 또 하나의 과제 앞에 놓여있었다. 여성의 권리와 정치·경제·사회적 지위 향상이었다. 한국 근대 시기 여성 선각자의 삶과 운동은 이러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간 역사였다. 그 걸음에 여성들의 민족운동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성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어 1920년대 들어 여성들의 움직임은 한층 활발해졌다. 여성 스스로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여성을 계몽하고, 단결을 다졌다. 1923년 무렵부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를 수용한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여성해방과 더불어 민족해방운동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7년에는 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기관인 근우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여성 권익향상 운동, 더불어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1년 이후에는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운동, 그리고 반제 반전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나라 밖에서 투쟁한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의열투쟁, 무장 항일투쟁 지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참여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만주와 중국 관내로 망명한 여성들은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며, 함께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국광복의 제단에 오롯이 자신의 삶을 바쳤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모(大母) 곽낙원

곽낙원(1859~1939)은 곽창훈의 딸로 태어났다. 14세 때 해주 백운방 텃골에 살던 김순영(金淳永)과 결혼하였다. 17세에 이르러 아들 김구(金九, 1876~1949)를 낳았다.

20세의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 김구의 항일투쟁 여정은 곽낙원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1896년 3월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처단한 일로 투옥되면서 2년여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11년 또다시‘안악사건’으로 투옥되어, 1915년 8월 가출옥 때까지 옥바라지를 지속하였다.

김구 가족사진(가흥)ⓒ국사편찬위원회
김구 가족사진(가흥)ⓒ국사편찬위원회

이후 1919년 3월 아들 김구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곽낙원도 1922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도 고단한 여정은 계속되었다. 1924년 1월 며느리 최준례(崔遵禮)가 사망하면서, 어린 두 손자를 도맡아야 했다. 임시정부의 형편상 아들 김구에게 의탁할 수 없었던 처지라, 결국 1925년 11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도 손자들을 키우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생활도 어려웠지만, 끊임없는 감시가 그를 괴롭혔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에는 감시가 한층 심해져, 1934년 4월 손자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향했다.

곽낙원 묘비에 선 김구ⓒ국사편찬위원회
곽낙원 묘비에 선 김구ⓒ국사편찬위원회

자싱(嘉興)에 피신해 있던 아들 김구를 만났지만, 함께 지낼 형편은 아니었다. 이후 줄곧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본군을 피해 피난을 거듭했다. 난징(南京)에서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를 거쳐 1939년 4월 다시 충칭(重慶)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때 인후염에 걸린 곽낙원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81세였다.

곽낙원은 임시정부에서 든든한 조력자로써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함께 생활했던 정정화(鄭靖和)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말없이 앉아 계신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큰 기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회고하였다. 또한 “매섭고, 대범하고, 절제되고, 소박한 어른으로 존경과 공경을 받았다”는 회고도 보인다. 평소 절약을 권면하였고, 돈이 생기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사후 충칭의 화상산(和尙山)에 안장되었다가, 1948년 국내로 이장되었으며, 현재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만주 항일투쟁을 지원하고, 순사(殉死)한 임수명

임수명(任壽命, 1894~1924)은 1894년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개성으로 추정된다. 14세 무렵 보통학교를 마치고 집안일을 도왔다. 16세 때 양친을 여의고, 18세인 1912년 서울 모(某)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이 무렵 신팔균(申八均, 1882~1924)을 만났다. 당시 신팔균은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활동을 하고 있었다. 대동청년당은 1909년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안희제(安熙濟)·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 시점은 1914년 5월 10일로 기록되어 있다. 결혼 후 신팔균은 만주로 떠났다. 임수명은 개성에 머물며, 남편의 동지인 신백우(申伯雨)·서세충(徐世忠)·엄익래(嚴翼來) 등에게 서신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1년 무렵 신팔균이 일본 군용 지도를 입수하기 위해 잠시 국내에 들어왔다. 남편이 떠날 때 임수명도 함께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기록마다 서로 달라서 정확한 망명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망명 후 임수명은 베이징과 만주를 오가는 힘든 삶을 이어가며, 남편의 독립운동을 내조하였다.

신팔균의 전사 사실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4년 8월 10일자)ⓒ국사편찬위원회
신팔균의 전사 사실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4년 8월 10일자)ⓒ국사편찬위원회

그런데 1924년 7월 2일, 신팔균이 만주 싱징현(興京縣) 왕친먼(旺淸門) 이도구(二道溝)의 산악지대에서 중국 마적과 교전 중 순국하고 말았다.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이어가던 신팔균의 죽음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임수명은 뱃속에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였다. 임수명은 남편의 전사 사실을 알지 못한 채 8월 만삭의 몸으로 귀국하였다. 주변에서 충격으로 인한 낙태를 염려하여 귀국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귀국 후 임수명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유복녀를 낳았다. 신팔균과 임수명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위로 네 아들이 있었다. 장남 신현충은 청주김씨와 신팔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귀국 후 힘겹게 살아가던 임수명은 10월 하순에 이르러 남편의 전사 소식을 확인하였다. 병 중이었던 셋째 아들마저 사망하자, 임수명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음독 자결하였다.

『조선일보』는 임수명의 귀국 과정과 자결 동기를 상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이회영 일가 독립운동의 버팀목, 이은숙

이은숙(李恩淑, 1889~1979)은 1889년 아버지 이덕규(李悳珪)와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한글과 천자문, 소학언해 등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을 두루 갖추었다. 20세인 1908년 10월 상동교회 예배당에서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혼인하였다.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영구(榮求)라는 이명이 있다.

1910년 12월 일가 60여 명이 서간도로 망명하자, 이은숙도 10개월 된 딸을 안고 함께 만주로 떠났다. 이후 일가족과 함께 만주 류허헌(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하였다. 1917년 6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혼사로 귀국하였다. 1912년부터 이미 국내에 있던 이회영이 1919년 베이징으로 가자, 이은숙도 2월 베이징으로 이동하였다. 임신한 몸으로 남매를 돌보며, 독립운동가를 보필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1년에 수십여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닌 적도 있었다. 1925년에는 손녀 둘과 세 살 아들을 병으로 잃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결국 이은숙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생활비 마련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 귀국해서도 그의 독립운동 자금지원은 계속되었다.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자금을 이회영에게 보내기도 했다. 1926년에는 자금 마련 일이 경찰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8년부터 경성부 병목정(竝木町)에 있는 고무공장(경성직뉴공장)에서 일하였다. 퇴근 후에는 바느질로 장충동 일대 기생의 옷을 만들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아껴 베이징으로 보냈다. 1930 년 들어 경찰의 단속으로 바느질마저 여의치 않자, 남의 집의 가사를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서간도 시종기』육필 원고 사진ⓒ이회영기념관
『서간도 시종기』육필 원고 사진ⓒ이회영기념관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1932년 10월 남편 이회영이 세상을 떠났으며, 1935년 봄 아들 이규창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갇힌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이은숙은 1940년 10월 딸 이규숙 내외가 있는 신경으로 옮겨갔다. 하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은숙은 이곳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뒤에도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 고달팠던 삶을 『서간도시종기』에 담았다. 1966년 3월 탈고한 『서간도시종기』는 약 10년이 지난 1975년 1월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로 출간되었다. 1979년 12월 서울 정릉에 있는 아들 이규창의 집에서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 서간도 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 허은

허은(許銀, 1909~1997)은 아버지 허발(許坺)과 어머니 이산운(李山運) 사이에서 3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조부는 허형(許蘅)이며,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바로 그의 고모이다. 또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그의 재종조부이다. 허위 일가는 1908년 허위가 순국하고, 1910년 나라마저 무너지자, 연이어 만주로 망명하였다.

석주 이상룡(1962, 독립장)
석주 이상룡(1962, 독립장)

1915년 4월 허은의 할아버지 허형도 가족들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 망명길에 허은이 함께하였고, 어린 소녀가 견디기 어려운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망명길도 정착 과정도 고통 그 자체였다. 일가는 퉁화현(通化縣)의 여러 곳을 거쳐 겨우 류허헌(柳河縣) 우두거우에 정착하였다. 허은은 당시 겨우 10살을 넘긴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를 도와 농사와 가사를 돌보며 성장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자, 1922년 1월 허은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혼인이 정해져, 1922년 음력 섣달 이상룡(李相龍)의 손자 이병화(李炳華, 1906~1952)와 혼인하게 되었다.

그 뒤 허은은 판스현(磐石縣)‧수란현(舒蘭縣) 등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가족은 물론 만주지역 항일지사들의 그림자가 되어 온갖 고난을 견뎌냈다. 허은은“개간에는 이력이 났다.”고 표현할 정도로 시어머니 이중숙과 함께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특히 허은은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의․식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여성들은 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량으로 대원들의 옷을 생산했는데, 허은도 그 일을 숱하게 하였다. 뒷날 “김동삼․김형식 등에게 손수 옷을 지어 드렸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개가 헤아릴 길 없다.”고 회고하였다.

왕래하는 독립운동가들과 대원들의 음식 제공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각종 회의가 집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허은은 회의 때마다 늘 부족한 먹거리를 마련하느라 고충이 컸다. 농사가 흉년일 때는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피복 공장에서 단추구멍 만드는 일감을 가져와 부업을 해서 음식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직원들을 해 먹이는 일 자체가 큰 역사였으며, 작은 국가 하나 경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 허은의 회고는 만주 항일투쟁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시사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1932년 시조부 이상룡이 순국하자 허은은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허은은 그 모질던 세월을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라는 회고록으로 담아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6. 독립운동 후방 역할을 한 여성들

한국 근대사의 과제는 주권을 되찾아 온전한 독립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엄혹하고 고단한 여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조직이나 직책에서 그 이름이 드러나는 여성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 그저 어머니와 아내, 딸로 불려졌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국광복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당연한 길(大義)’로 여기고 기꺼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다. 특히 만주와 중국 관내로 망명한 여성들은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묵묵히 후방을 지원했다.

독립을 향한 투쟁의 과정에서 더러는 전통 시대가 요구했던 부덕(婦德)의 틀 안에서 시대 소명에 부응하기도 했으며, 더러는 그 틀을 깨고 과감히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히 나아갔다. 2024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4명의 독립운동가는 전자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가이다. 그 힘겨웠던 시간을 ‘당연한 길’로 여기고 담담히 걸어왔던 그들이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우리는 한 발 더 나가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