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6월 독립운동가

06월의 독립운동가

프레드릭 에이 맥켄지/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루이마랭((1869) ~(1931) / 1850 ~1932 / 1871 ~1960)

훈격 :건국훈장 독립장/애국장/애국서훈년도 :2014/2015/2015

1904년, 1906년 두차례 한국을 방문 후 취재내용을 책으로 발간

1920년 영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

1919년 미국에서 서재필과 함께 한국친우회를 설립

1920년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미국 대통령과 상원에 제출

1921년 프랑스에서 한국친우회를 설립하고 의장으로 활동

창립모임 연설에서 한국인들에게 효율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많은 가입자를 확보해야 한다고 회원들에게 촉구

상세자료받기

프레드릭 에이 맥켄지 /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 루이 마랭

프레드릭 에이 맥켄지 , (1869) ~(1931) , 독립장 (2014)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 1850 ~1932 , 애국장 (2015)루이 마랭 , 1871 ~1960 , 애국장 (2015)

1. 1919년 한국 독립을 위해 앞장선 미주·유럽의 외국인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은 유럽과 미국에 즉각적으로 알려졌다. 정의감의 발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와 이를 무단으로 진압하는 일본의 폭력에 양심 있는 외국인들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연대했다. 1919년 미국에서 설립된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외국인들의 단체였다. 종교인‧언론인‧교육자 등을 망라하여 한데 모인 이들은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했다.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 열기는 유럽으로 옮겨 붙어 1920년 10월 영국, 1921년 6월 프랑스에서 한국친우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인의 옆에 선 한국친우회의 주역들은 정의로운 한국의 친구들이었다.

2. 미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창설한 플로이드 W. 톰킨스

1850년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난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주니어(Floyd Williams Tomkins Jr, 이하 톰킨스)는 1872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1875년 신학대학을 마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뉴욕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한 그는 콜로라도, 와이오밍,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899년 3월부터 필라델피아 성삼위일체교회(the Church of the Holy Trinity)의 목사가 되었다.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목사였던 그는 1919년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치가 내걸리자 이에 호응하며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했다.

성삼위일체 교회(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소재)ⓒ독립기념관
성삼위일체 교회(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소재)ⓒ독립기념관

1919년 4월 14~16일간 필라델피아 리틀극장(The Little Theatre)에서 ‘미주 3ㆍ1운동’이라 평가되는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열렸다. 3ㆍ1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은 한국인들이 한데 모인 회의에는 미국의 저명한 종교인과 교육자, 언론인들도 참석했다. 첫 미국인 연사로 나선 톰킨스는, “독립을 주장할 근거가 되는 일에 주력할 것”과 “파리강화회의에서 다뤄진 대원칙에 관심을 집중할 것”을 당부하며 자유·정의·인도 등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한국독립운동의 원칙과 방향을 제안했다.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를 통해 확인된 한국인과 미국인의 연대는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친한(親韓) 단체 결성으로 이어졌다.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가 조직된 것이다. 친우회의 회장은 톰킨스가 맡았으며, 부회장에 오벌린대학 사회학과 교수 헐버트 밀러(Hebert A. Miller), 서기 이브닝 리더(Evening Leader)지 기자 조지 베네딕트(George G. Benedict), 회계 페리슬리(H. E. Pasisley)가 참여했다. 한인회의 개최를 주도했던 서재필 박사는 이사진으로 참여하며 친우회 활동과 한국인 독립운동가와의 연계를 담당했다.

한국친우회는 극동에서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성장을 지원하려는 미국 내의 여론 조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각지에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펜실베니아주[레딩(Reading), 어퍼 퍼키오멘 밸리(Upper Perkiomen Valley)]와 오하이오주[포스토리아(Fostoria), 티핀(Tiffin), 핀들레이(Findlay), 리마(Lima), 콜럼버스(Columbus), 알리언스(Alliance)], 매사추세츠주[맨스필드(Mansfield), 보스턴]와 워싱턴 D.C, 뉴욕 등 동부지역에 한국친우회 지부가 집중적으로 조직되었다. 1919년 10월 이후에는 시카고, 캔자스시티(Kansas City), 안 아버(Ann Arbor) 등 중부 지역과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오레건주 뉴버그(Newberg)에도 지부가 만들어졌다. 한국친우회의 확장은 톰킨스를 비롯한 종교인·교육자의 협력과 각 대학에 유학 중인 한국인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한국친우회 워싱턴 D.C. 사무실이 있었던 우드워드 빌딩(미국 워싱턴 D.C. 소재)ⓒ독립기념관
한국친우회 워싱턴 D.C. 사무실이 있었던 우드워드 빌딩(미국 워싱턴 D.C. 소재)ⓒ독립기념관

3ㆍ1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많은 미국인들은 소위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며 일본 비판을 주저했다. 이때 톰킨스는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대중 집회를 주도했다. 특히 그는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거중 조정을 각계 인사에 호소하고 요청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군축회의 개막을 앞두고, 톰킨스는 미국 한국친우회 25,000여 명의 회원을 대표하며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청원서에는 “일본에 의한 한국 침탈과 한국민의 열망과 배치되는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는 국제적 원성과 비판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결국 세계 여타 국가와 관련된 극동 평화에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경고와 ‘합리적인 수준의 정의를 한국이 쟁취할 수 있도록 미국이 거중 조정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인에 대한 지지와 애정은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도 발휘되었다. 지진 후 한국인에 대한 학살 소식을 접한 톰킨스는 11월 20일 일본의 학살과 탄압을 비판하는 항의서를 제출했다.

1932년 남다른 도덕성과 정의감으로 존경받던 톰킨스가 숨을 거두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영국에서 정의로운 한국인의 투쟁을 옹호한 프레드릭 맥켄지

1869년에 캐나다 퀘벡주 리치몬드에서 태어난 프레드릭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는 1881년 영국으로 건너가고 20대 중반부터 영국 런던에서 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폴몰 가제트(Pall Mall Gazette)사를 거쳐 데일리메일(Daily Mail)사로 자리를 옮긴 후 동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며 종군기자가 되었다. 1904년 만주와 한국 등지에서 러일전쟁을 취재한 맥켄지는 일본군의 지휘체계 등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맥켄지는 러시아의 경쟁자인 일본에 대해 큰 비판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비극』 표지와 서문ⓒ독립기념관
『대한제국의 비극』 표지와 서문ⓒ독립기념관

1906년 두 번째로 한국에 도착한 맥켄지가 목격한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에 혈안이 된 나라였다. 한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국인을 탄압하는 일본에 크게 실망한 그는 이를 비판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의병의 활약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취재하여 이를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1907년 말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며 목도한 현실을 『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에 밝혔으며, 그에 앞서 『베일 벗은 아시아(The Unveiled East)』(1907)를 통해 동아시아에 등장한 ‘새로운 일본’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한때 일본인의 친구로 여겨지기도 했던 맥켄지는 영국에서조차 ‘반일’ 인사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이를 위해 사용된 폭력적 수단은 결국 일본 자신의 안녕과 세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 서문』)이라고 확신한 맥켄지는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비판하고, 한국의 정의로운 저항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다. 1920년 ‘자유와 정의’를 지지하며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을 발간한 것이다.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맥켄지의 신념은 언론․저술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1919년 11월 김규식을 통해 한국 독립의 선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 그는 영국에서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마침 미국에서 구미위원부가 설치되고 한국친우회 활동이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김규식 등은 런던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던 맥켄지의 신간이 1920년 4월 발간되자 일본의 아시아-시베리아 지배 문제, 한국에 대한 학살과 탄압, 이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투쟁이 영국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 10월 3일 파리위원부의 황기환이 런던에 도착했다. 영국 언론은 ‘한국사절단[Korean Mission]의 E. K. whang(황기환)’이 일본 통치하에 있는 조국의 비참함을 알리기 위해 왔다고 전했다. 황기환은 맥켄지가 묵고 있는 런던대학(University College London) 인근에 한국대표부 런던위원부의 거점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영국의 신문들은 “한국의 혁명가들이 이제 이곳 런던에 본부를 세우고 있다. 런던은 세계의 선전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며 주목했으며, 그 후속으로 한국친우회가 결성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러한 구미위원부의 영국 활동과 언론의 주목, 그 뒤에는 늘 맥켄지가 있었다.

황기환('95, 애국장)
황기환('95, 애국장)

맥켄지는 1920년 4월에 발간한 ‘한국의 투쟁’을 통해 “백인은 아시아를 잃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는 “일본의 아시아 지배는 아시아라는 한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우려는 많은 영국 지식인의 공감을 얻었다. 그 결과 1920년 10월 26일 런던에서 한국친우회가 창립되었다.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창립식에는 로버트 뉴만(Robert Newman) 의원, 르웰린 윌리엄즈(Llewellyn Williams) 전 의원, 라일 새뮤엘(A. Lyle Samuel) 등 정계 인사를 비롯하여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귀족과 각계 인사 총 62명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맥켄지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자유 회복을 위한 지원 등을 결의한 뒤 간사로 활약했다. 한국친우회 결성 이후에도 한국인의 독립을 지지하며 언론활동을 하던 맥켄지는 1920년대 러시아의 볼셰비즘을 취재하는 등 언론활동을 이어가다가 1931년 네덜란드 제이스트(Zeist)에서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한국의 독립을 옹호한 프랑스의 고귀한 양심, 루이 마랭

1871년 프랑스 로젠 지방의 뫼르트(Meurthe-et-Moselle)에서 태어난 루이 마랭(Louis Marin)은 탐험가이자 인류학자이며, 정치인이었다. 로렌지역의 중심지인 낭시의 말그랑쥬 콜라쥬(Malgrange College)를 거쳐 파리에 정착한 그는 1899년부터 그리스, 폴란드 등의 동유럽과 러시아를 거쳐 중국 서부까지 탐험했으며, 1901년에는 만주와 중국, 한국 지역을 여행했다. 급변하는 아시아 정세를 목도한 그는 파리에서 인류학자로 활동하는 한편,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낭시의 의원으로 정치활동을 본격화한 후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의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친우회 결성을 위한 회합에 대한 보고(1921), 프랑스 경찰의 정보 보고서로 라 카즈가(rue Las Cases) 5번지 사회 박물관(Musée social)에서 회합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한국친우회 결성을 위한 회합에 대한 보고(1921), 프랑스 경찰의 정보 보고서로 라 카즈가(rue Las Cases) 5번지 사회 박물관(Musée social)에서 회합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프랑스에서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파리강화회의에 특파된 김규식에 의해 촉진되었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5월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 독립 항고서’ 등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 독립을 홍보하는 각종 문서를 언론에 배포하였다. 비록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강들은 한국인의 요구를 외면했지만, 김규식은 계속해서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선전활동을 이어갔다. 8월 6일 파리에서 열린 한국통신국의 연회에서 김규식은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고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는 중국, 러시아, 미국은 물론 프랑스의 인사들이 참석하여 한국 독립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랑스의 정치인으로서 참석한 루이 마랭은 이후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그가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에 앞장선 것이다.

1921년 4월 영국에서 활동하던 황기환이 파리로 돌아오자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은 빠르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21년 6월 23일 파리 사회박물관에서 한국친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루이 마랭(Louis Marin)의 주재로 시작된 회의에는 쥐스탱 고다르(Justin Godart) 하원의원, 베르통(Berthon) 하원의원, 문인 끌로드 파레르(Claude Farrere), 중국인 사동발(謝東發, Scie Ton Fa)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루이 마랭은 먼저 “프랑스는 언제나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보호와 애정을 가져왔다”고 환기하며, “3,000만의 인구를 가진 불행한 나라 한국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한국민들에게 도움을 제공함’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회는 오스만 가(bd Haussmann) 93호를 본부로 세워졌다. 루이 마랭은 초대 회장을 맡아 재정 등을 지원했다.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 이후 루이 마랭은 연금부, 보건체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는 한편, 인류학 및 민족학 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도 활동했다. 민족지학회(Société Ethnographique de France), 상업지리학회(Société de géographie commerciale), 국제 인류학 연구소(Institut international d'anthropologie) 등에서 활동한 그는 프랑스 지리․인류학계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1945년 9월 일본이 항복하자 프랑스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서영해는 루이 마랭에게 “회장님은 한국이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처해 있을 때,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을 도와주고 옹호한 프랑스의 고귀한 양심을 대표하는 분이셨습니다”라며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